2차/무기미도

라후샬롬 / 정서 검사

J^2MR 2024. 12. 29. 00:26

라후 그리고 샬롬 (커플링으로 읽힐 수 있는 표현이 다수 등장합니다)

* <레인 버스트>, <플라워 블룸>, 메인 챕터 13 <약자> 스포일러 有

* 일부 설정 날조 / 3인칭이 전부 '그'로 고정됩니다.

 

 

 

 

  돌아왔구나.

 

  높은 층고를 따라 메아리가 두 번 울렸다. 차가운 회랑을 거니는 발자국이 텅, 텅, 총처럼 자리에 남았다. 찐득하게 떨어지는 발자국에 검붉은 피가 섞여 자국을 남겼다. 숫제 괴물의 것인지 사람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걸어오고 있는 자 또한 그렇기 때문이다. 우뚝이며 휘청거리는 체구가 '정상'을 가장하는 모습이 그나마, 흰 헬멧 속 사람의 머리통이 들어있으리라고 추측하게 해줄 뿐이었다.

  흑석영은 유유히 백의 정예 곁을 속도에 맞춰 유영했다. 다만 특유의 기계음으로 몇 번 삐빅거리며 찰칵거리는 렌즈의 소리를 삽입하는 것으로 보아, 흰 공간에 남은 핏빛 발자국이 꽤나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몇 가지 서로 다른 주파수가 흑석영을 통과하자, 바닥의 기울기가 미세하게 조정되었고, 큐브 수용액이 틈새에서 흘러나와 피들을 깨끗하게 지워냈다.

  정말이지 손 하나 안 쓰는 자들이다,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을 몸으로 표현하지 않기 위해 백의 정예는 상처를 부러 짓씹어야 했다. 열이 오르고 있는 팔을 마치 저항의 몸짓인 것처럼 긁어내리고 피멍들게 쥐었다.

 

  "수고했어, 백의 정예. 이로써 서구의 위기는 해결되었고 세계는 다시 균형점을 향해 돌아갈거야. 티핑 포인트는 제거되지 않았지만, 지하에 대해 유의미한 승리는 거두었지. 곧 서구 집행 위원회가 다시 기능을 회복하고 MBCC가 모든 권한을 돌려받으면... 백의 정예. 듣고 있는 거야?"

  "왜 그렇게 구구절절하게 설명을 하는 거죠?"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는 건 정서 검사의 방식이야. 보고나 추가 요청의 방식으로는 옳지 않지."

  "실례했군요. 전 정예 요원일뿐 청부업자가 아니지 않냐는 말이었습니다."

 

  그 말에 흑석영은 위아래로 삼각형을 짧게 요동쳤다. 라후는 이제 저것이 비웃음임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비웃음이 그렇듯, 저 조소 역시 라후뿐만이 아닌 스스로에게도 향하고 있었다. 금수에게 왜 내가 이걸 구구절절히 설명하고 있었나, 와 같은 사소한 자문처럼. 

 

  "동시에 너는 HUSH 프로젝트의 중단 동안 청부업자의 빈 자리를 메꾸는 존재기도 하지. 너무 많은 의문을 품고 있군, 백의 정예."

 

  백의 정예는 붉은 가시선만 죽죽 그어진 팔을 들며 숨만 몰아쉬었다. 마음대로 생각하라지. 어차피 정서 검사 스무 개 정도만 추가되고 끝날 사항이다. 블랙링에서 온갖 오염덩어리를 끌어안고 돌아온 충견에게는 이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욱하는 성질을 내비칠 수 없을 때면 그마저도 족쇄에서 흘러 들어온 변이의 탓이라고 이야기하면 그만이다. 표식이 새겨졌어도 그 표식으로 자신을 어를 이는 이제 여기에 없지 않던가. 디스씨의 진창 하나 제 손으로 집어들지 못하는 자들은 감히 저가 제 목줄을 직접 건네준 줄도 모르겠지!

  문득 그 사실을 생각하니, 라후는 화가 났다. 흐른 피에서 스멀스멀 나오기 시작한 광기일지도 몰랐다. 오염을 제거하듯 천장에서 옅게 분사되는 블루레인이 흰 옷과 헬멧 표면의 변이들을 1차적으로 제거했다. 축축해진 천을 벗겨내는 기계를 라후는 반사적으로 잡아 우그러뜨렸다. 이런, 저질렀군. 족쇄와 표식이 충돌했나? 당혹스러운 흑석영이 급격히 7단계 정서 검사를 시행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백의 정예에게는 앵커도, 관측소도 없었지만 표식만은 남아있었으니까.

  화가 많이 났나 봐. 오히려 후련해할 줄 알았는데. 왜일까?

  라후의 광분한 주먹이, 날숨이 등을 가득하게 부풀렸다. -도대체 왜 내가 이 모든 것을 놔두고 살아야한단 말인가. 나는 이미 한 발자국을 내딛고 왔다. 마음 같아선 오늘 세 발자국을 더 내딛을 수도 있을 것이다. 피를 손에 묻히고 과업을 완성하여 마침내, 마침내 해안가로 달려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게 삶이지! 간지러운 송곳니를 갈고, 물고, 뜯으며 끝없이 달리는 것이! 흰 거죽을 뒤집어 쓴다고 사냥개가 목양견이 될 리는 없었다. 족쇄의 끝에 연결되어 있는 자는 이 광기를 가라앉히기엔 너무 아득했다. 팽팽하지 않은 사슬을 입에 물고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도는 개처럼 라후는 동공을 부산스레 움직였다. 흰 빛으로 가득한 세계에 어울리지 않는 피투성이 개가 벽을 까드득 긁어내렸다. 블랙링이 당긴 도화선이 마침내 그의 재갈을 풀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도와줘야 할 것 같네. 웅웅대는 이명에 맞추어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 내면의 짐승이 바스라지는 녹처럼 껍질을 깨트리기 시작했다. 뜨거운 피가 뼈를 갈라내고 이마의 한 가운데서 솟아나기 일보 직전이었다. 두근대는 심장이 모든 것을 갈라섰다. 들숨만 들이차는 폐가 끊임없이 산소를 심장으로 보내었다. 마침내 그것이 터지기 일보 직전-

  그렇게 화 내면 기껏 들어간 게 무용지물이 되잖아, 라후.

  라후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돌아갔다.

  ...아, 이런...

  모든 것이 수월해졌다. 누군가가 날숨으로 촛불을 불어끈 것처럼. 들끓던 피가 차갑게 식었다. 낙원의 공기는 더 이상 서늘하게 느껴지지 않았고, 도리어 실내 특유의 미지근한 텁텁함까지 드러냈다. 꺼진 광기에서 연기만 조금 피어올랐다. 해갈된 감정의 끝에서는 심지어는 단맛까지 나고 있었다.

  흑석영이 소환한 '정서 검사' 장비들은 푸른 역장을 뿜어내려다가, 안정화된 생체 신호에 따라 도로 제 몸을 접었다. 지금 라후의 모든 감각들은 고양되지 않은 채 선명했다. 뒤집어 쓴 오니汚泥가 깨끗한 물에 씻겨내려가듯이 사고가 이성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라후의 눈동자는 이제 허공을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그 시야의 방향에 흑석영이 알짱거리기 전까지는.

 

  "조심하도록 해, 백의 정예. 방금 그것은 A급 정서오염이었어. 계속 이렇게 쉽게 '흥분'하면, 우리도 널-"

  "HUSH-X."

 

  말이 잘린 흑석영은 침묵으로 답했지만, 말했듯이, 그것은 라후의 알 바가 아니었다.

 

  "7대 청부업자를 확인하고 싶습니다."

 

  푸른 액체로 축축해진 피부에서 붉은 빛이 가라앉는 것을 관측하던 흑석영은 침묵을 5초간 늘렸다. 여느 때와 같이 나온 음성은 평이하고 오만했다.

 

  "X는 연구를 위해 온존되고 있어. 불필요한 접촉은 연구에 지장이 가. 왜 그를 만나고 싶은 거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라후는 잠시 머뭇거렸다. "혹시 변이가 표식을 타고..." 또 다시 흰 소리가 들려와 문장이 끊어진다. 여전히 거짓말에 형편없네... 그 말에 라후는 나직한 웃음을 몇 번 지을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맞아, 그래서 말을 하지 않는 것으로 노선을 틀었지.

 

  "X에게로 건너갔을지에 대해서로군."

 

  흑석영은 라후가 무심코 던진 말 하나에 꽤나 흥미를 (혹은 위기를) 느낀 모양인지, 잠시 암호화된 기계의 언어로 이야기했다. 저 너머에서 저들끼리 지하며 목자며 주술이며, 편협한 숫자의 오차와 함께 곁들여질 단어들을 라후는 기다리고 있었다. 1분 남짓한 시간 동안 빠르게 끝난 회의에 흑석영은 도로 푸른 빛을 은은하게 뽐내며 상대방을 가볍게 스캔했다. 낮은 등급의 검사였다.

 

  "접촉 제한은 3분이야. 데이터 수집은 동시에 이뤄질 예정이니 지체없이 확인을 끝내도록."

 

  이것 봐. 결국 믿어주잖아. 말을 누락시키니까 뒷말을 저들끼리 상상할 수 있지.

  꼭 누군가에게 말을 걸기라도 하듯, 라후는 속으로 읊조리면서 헬멧을 벗었다. 흉터와 피로에 가라앉은 눈동자가 잔기스가 가득 난 헬멧을 몇 번 훑다가 그대로 데구르르 굴러갔다.

  대견해. 자랑스러워해도 돼.

  "허가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라후, 더 이상 뒤는 돌아보지 않기로 했잖아.

  그게 너의 고맙다는 인사인가?

  샬롬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라후는 어쩐지 그가 조용히 미소를 짓는 중이지 않을까 상상하게 되었다.

 

 


 

 

  증기가 뿜어져 나오고, 단단히 닫혀 있던 뚜껑이 열렸다. 유압 실린더가 오르락내리락거리며 내부의 액체를 바깥으로 조금씩 흘려보냈다. 규칙적인 파동과 함께 저 깊은 안쪽에 가라앉은 이가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올랐다. 퐁, 하고 떠오른 공기방울이 터지는 모습을 보던 라후는 손을 뻗었다. 검은 장갑이 아닌 맨살이 차가운 피부에 닿았다. 시체처럼 차가운 피부, 야윈 몸, 가냘픈 상처들. 그때 그 시간에 멈추어 고정된 것만 같은 이는 눈을 뜨지 않는다.

  그래. 표식을 발동시키기 위해 의식은 필요하지 않지. 오로지 앵커만이 필요하니까.

  꿈틀거리는 분노가 저 안쪽에서 다시 솟아올랐다가 사그라들었다. 표식 너머에 존재할 괴물은 타고 남은 재까지 맛있게 집어먹으며 심장처럼 박동하고 있었다.

  그게 눈앞의 자가 살아있다는 유일의 증거였다.

 

  뇌의 회백질 내의 뇌내망상 속 어딘가에 자리잡았을 표식이 라후를 끌어당겼다. 무의식과 의식 사이 어중간한 위치에서 샬롬은 목소리와 빛을 보았다. 이제는 다 부서져내린 BR-002의 파편들 사이 여전히 꽂혀 있는 거대하고 높창. 그 창 건너에서 걸어오는 자신의 기사.

  오랜만이야. 여전히 상처투성이네.

  라후는 웃을 수 없었다. 대신 상투적인 인사를 건네주기로 했다. 이를테면 평범한 자들이 평범한 삶에서 돌아올 곳의 문을 열고 제일 먼저 하는-

  다녀왔어.

 

  자, 여기까지가 30초.

  백의 정예는 흑석영의 감시 아래 손을 액체 탱크 바깥으로 빼내었다. 물기에 젖은 얼굴에서 머리카락 몇 올을 떼어주고선 제 손을 얌전히 탱크의 벽에 두었다. 고요한 곳에서 물소리가 메아리쳤다. 흑석영은 실시간으로 앵커를 관측하며 백의 정예에게서 나타나는 수치를 확인했다.

  표식과 족쇄를 공명시켜서 국장의 앞에 날 데려다주는 방식은 아주 위험한 방식이었어. 자칫하다가 네가 블랙링에 집어삼켜질 뻔 했잖아.

  흑석영의 뒤에 있는 자(들)은 손가락을 두드리기도 했고, 지루한 빛을 불규칙적으로 깜빡이기도 했다. 백의 정예의 확인 방법을 보고 그 지점에서 표식의 오점을 짚어내고 싶었다. 족쇄와 표식을 연이어 목줄로 찬 수감자의 충동에 어울려준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도구로서의 결함이 정예에게서도 똑같이 발견된다면 그거야말로 불필요한 정서검사를 경제적으로 대체한 결과가 되지 않겠는가.

  라후는 후련한 듯이 웃었다. 덕분에 세상을 구했고, 네 복수도 완성할 수 있었지. 마음에 들지 않아? 그 말을 마친 뒤 라후는 정말로 상대방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슬쩍 던지는 곁눈길과 머뭇거리는 입, 자신도 모르게 만지게 되는 뒷목. 눈치를 보다가 라후는 헛기침을 했다. ... 정말 마음에 들지 않은 건 아니지?

  하지만 백의 정예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에게 주어진 장장 2분의 시간 동안 그는 수조의 앞에 앉아 하염없이 청부업자를 응시할 뿐이었다. 아주 오래간의 시간이었다. 미동도 않는 어깨를 보다보면 이 자가 숨을 쉬기는 하는 건지 의심될 정도였다. 그는 뒤로 모아 하나로 묶은 검은 머리칼이 얼굴의 사선으로 떨어질 때에도 꿈쩍 않고 수조의 안을 바라보았다. 무릎 위에 올려둔 두 손이 가볍게 주먹을 말아쥐고 있었다. 평온하고 또 평탄했다. 절대적인 이성을 찾은 것 같이 보였다.

  그제야 샬롬은 청부업자로서의 태도를 접어두고 가시 뚫린 팔로 상대의 맨팔을 더듬을 수 있었다. 검고 흰 틈새가 잠시 요동쳤다. 푸른 가시가 몇 번이고 샬롬을 찔렀다. 다가오는 규칙들을 라후가 팔로 내치려 했지만 샬롬이 힘주어 잡은 손에 저지될 뿐이었다.

  고마워. 정말로. 그건 내게 있어서... 기적이었어.

  저 자가 저렇게 얌전할 이가 아닌데. 흑석영의 뒤에서 두 번째의 숫자를 지닌 이가 웃으며 말했다. 족쇄의 힘인걸지도 몰라. 가설에 추가시켜둬.

  샬롬의 눈동자에 서린 이채가 라후의 것에도 담겼다. 죽어서야 살아있는 역행하는 자. 그 자의 시야에서 알짱거리던 라후는 푸른 창의 너머로 손을 뻗었다. 

  붉은 가시로 연결된 두 수감자는 비좁은 틈새로 겨우 닿을 수 있었고, 샬롬이 라후의 손을 꼭 깍지끼며 잡은 것이 둘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포옹이었다.

  이거 꽤 괜찮은 정서 검사 방법이네. 새로 고안해 볼까? 세 번째의 숫자를 지닌 이가 말했다. 감정이 연결된 문장을 꺼내와서 대답하도록 하는 거야. '달은 순전히 도둑인데, 그녀의 창백한 불꽃은 태양으로부터 잡아챈 것.'과 같이. 잠시만. 이런 문구가 있던 고전 소설이 아직 남아있을텐데. 표식을 지닌 자가 문구를 말할 때, 앵커가 흔들리는 지점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면 감정의 격리도 한층 더 쉬워질거야. 

  상대의 손등을 제 볼에 짧게 가져다 댄 샬롬이 나직하게 말했다. 라후. ... 안아줄 수 있어?

  그 검사 이름은 기준선(Baseline) 테스트가 좋겠어. 첫 번째의 숫자를 지닌 이가 대꾸하며 좌중을 조용히 시켰다. 자, 잠시. 우리의 정예가 30초를 남기고 드디어 행동을 취하고 있잖아.

  기꺼이 그러지.

  한참을 숨을 죽이던 백의 정예는 자리에서 일어나 수조의 안으로 손을 뻗었다. 첨벙거리는 물소리와 함께 푸른 수면에 떠 있는 청부업자가 들어올려졌다. 어깨와 팔, 가슴팍의 일부가 겹쳐졌다. 썩지 않는 인형에게도 심장은 있음을 확인하듯 라후는 귀 기울여 그를 들었다. 라후는 샬롬의 매끈한 손끝을 톡 건드리더니, 서서히 깍지끼며 힘을 주어 잡았다. 공기가 닿자 미약하게 돌아오는 호흡에 박자를 맞추었다. 정박을 따라 가슴이 부풀었다가 내려앉았다.

  뒷목을 지나, 상대방의 등허리를 받친 손끝을 라후는 무심하게 두드렸다. 마치 인형의 건전지를 빼는 것처럼. 그러자 무의식의 저편에서 땔감을 먹기 위한 괴수가 마수를 뻗기 시작했다. 반투명하고 푸르른 빛줄기가 샬롬의 피부를 타고 뱀처럼 올라왔고, 라후의 손가락을 건드렸다. 블랙링으로 소진된 생명력을 감지한 것처럼 그것은 다정하게 위로하는 시늉을 했다. 분노를 먹고 대신 생명력을 뱉었다. 

  푸른 가시가 군데군데 박혀 있는 모습이 의식의 저편에서 보이는 것만 같았다. 라후는 저를 휘감은 붉은 가시를 뚫고 지나갈 수 없었다. 바로 이곳이 기준선이 되는 걸지도 모른다. 결코 건너갈 수 없는 과거와 미래 사이의 간극은 가시덤불로 뒤덮인 담장 하나 정도의 두께였으니까.

  너머에서 샬롬이 웃으며 말했다. 자꾸 돌아오면 버릇 돼.

  알아. 그래도 보고 싶어. 계속 확인하고 싶어.

  내가 죽었을까봐 그래?

  네가 죽었을까봐.

  족쇄는 새로이 표식을 휘어감을 수 없었다. 이미 휘어감고 있었기 때문에. 규칙으로 고정된 샬롬에게로 건너갈 변이는 그러나, 조금은 있었다. 라후는 알고 있었다. 진실을 섞은 거짓말일수록 더 유리하게 작용한다는 사실을. 지금의 포옹과 부서져 내린 닻이 이 자를 얽맨 규칙에게 무슨 짓을 할지.

  그러나 흑석영이 관측하기엔 너무 미약하고, 조막만한... 그들이 무시할만한 수준의 변수다.

  자, 이로써 나는 오만한 자들의 몰락을 향해 또다시 반 걸음을 내딛었다.

 

  라후는 깊은 숨을 내쉬며 눈을 잠시 내리감았다. 표식이 징징대며 족쇄를 몰아내려 했다. 주인이 둘 이상인 개는 이미 상반된 명령에 익숙했다. 다행히도. 이제 10초 남았어, 라후. 흰 목소리가 속살거리자 라후는 다시 팔을 거두기 시작했다. 등허리를 받친 손이 빠지자 서서히 기울기 시작한 상체. 스르륵 떨어지는 자줏빛의 머리칼들이 꺾인 고개와 함께 먼저 수면에 잦아든다. 이윽고 이마, 눈꺼풀, 목, 입, 코... 마지막까지 그것을 따라가던 라후는 깍지낀 손을 놓지 못했다. 푸른 빛줄기가 그의 손가락을 하나씩, 하나씩 떼어내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상대방의 손등을 어루만지며 맥박의 존재를 찾아 헤맸다.

  아직 듣고 있지. 반시체를 안아든 라후는 지친 목소리였다. 어찌 보면 솔직한 목소리라고 할 수도 있었다. 칭찬은 들었으니 됐어. 작별인사를 해 줘.

  그 말에 샬롬은 망가진 인형처럼 웃었다.

 

  다음 순간 흑석영은 백의 정예가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백의 정예는 상대방의 손바닥에 이마를 파묻었고, 마치 '쓰다듬어지는' 것처럼 행동했다. 물기에 젖은 손가락 틈새로 머리칼들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흉터가 남은 왼눈가의 굴곡을 새끼 손가락이 더듬었다. 눈썹과 눈꺼풀을 약지로 따라 그리며 엄지로 그었다. 그대로 주욱 미끄러져내린 손은 거칠고 축축해진 볼을 몇 번 쓰다듬다가 수조 아래로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첨벙! 튀긴 물방울이 라후의 볼에 후두둑 튀었다.

 

  철커덩,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금 유압 실린더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라후는 가만히 보존액을 담은 탱크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헤집어진 앞머리칼들이 중력을 거스르지 못하고 아래로 축 처졌다. 이마에 남은 미약한 체온이 점점이 돌다가 싸늘한 낙원의 공기에 서서히 열을 빼앗겼다.

 

  "3분이 지났어, '라후.'"

 

  백의 정예는 말없이 일어났다. 깊은 물 속으로 잠기는 이의 그림자도 보지 않고 돌아섰다. 높은 회랑과 함께 흑석영은 방금의 데이터와 남은 조사에 대해 쫑알거렸고, 메아리가 되어 곱절이 되는 명령들에 라후는 꿋꿋이 참을 인을 새겼다. 제 볼에 튄 물방울을 손등으로 가볍게 훔치고서는, 그것을 망설임없이 핥았다. 생채기가 난 피부에 타액과 물이 섞여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약간의 쓴 맛이 나는-피 때문일지도- 물이라는 감상과 함께 라후는 문을 열고 지하의 연구실에서 나갔다. 자동으로 연구실 내의 불필요한 전등이 꺼졌다. 어둠이 찾아오자 한량한 바람이 등 뒤에서 불어 왔다.

 

  라후는 뒤를 돌아보았다. 표식이 연결된 그의 정신이 어둠 속 흰 형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눈을 깜빡이던 그는 새장치고는 너무 높은 천장을 보며 나직하게 웃었고...

  빛이 가득한 세계의 문을 닫아 어둠을 단절시켰다.

 

  그리고 검붉은 무無가 회전하기 시작했다. 세포의 체계는 한 세포와 연결된 세포와 또 연결된 세포와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끔찍하게도 분명히 어둠과 대비되는, 희고 높은 분수가 연주된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아테네의 티몬, "the moon's an arrant thief, And her pale fire she snatches from the sun"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창백한 불꽃, "And blood-black nothingness began to spin. A system of cells interlinked within cells interlinked within cells interliked within one stem... And dreadfully distinct against the dark, a tall white fountain played." (드니 빌뇌브, 블레이드 러너 2049 중 재인용)

 

 

 

 

2주년 공모전 제출작. 당선작 (대상을 타버렸다... 감사합니다!)

원래는 회색 글씨들이 모두 흰색글씨여서, 드래그를 해야만 볼 수 있었다. 나름의 연출로 넣어둔 부분인데 (무의식 속의 대화라는 점, 외부의 힘이 들어가야만 밝혀지는 맥락들이란 점에서) 포스타입이 글씨색을 싸그리 날려버렸네..?^^ 문의 창구가 마땅한 곳이 없어서 지금 이 악물면서 존버하는 중이다. 진짜 포타 왜이러냐? 갈수록 텍스트 에디터가 구려진다. 글러 편파? 뭐 그런거 하세요? 글리프에 올리기로 결심하면서 모든 문제 말끔히 해결 ^^ 글리프가 섭종을 하며 티스토리로 옮겨와야했다 엉엉

내용 자체는 블레이드러너 2049 (드니 빌뇌브 作) 를 많이 가져왔다. 이성을 중시하는 낙원과 비이성이 말살되어야만 하는 레플리칸트들에게서 공통점이 보였다. 작중에서 '기준선 테스트'라고 직접적으로 언급하기도 하고. 도구와 인간, 자유의지라는 키워드 자체는 샬롬과도 연결되니까 괜찮은 레퍼런스라고 생각했다.

라후와 샬롬은 과연 14챕에서 재결합을 할 수 있을까요? (제발ㅋㅋ) 군만두님 이 둘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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