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퍼는 가장 기대하지 못하던 곳에서 가장 기대하던 답을 찾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의 형태는, 놀랍게도 그 자신은 모르겠지만, 우산을 쓰고 다니는 한 남자의 것과 충분히 닮아 있었다. 눈앞에서 보이는 순수한 폭력과 그에 반하는 공포의 굴복에 엔퍼는 경의를 넘어 황홀감까지 느끼기로 했다. 망치와 끌로는 결코 끌어내지 못했을, 알 껍데기 안쪽 잠들어 있는 공포의 씨앗이여! 그 순수한 광기와 진솔된 면에 엔퍼는 드디어 저가 찾던 왕국의 첫 국민을 맞이한 기분이었다.
철창을 우그러뜨리고 4개의 층을 모조리 하나로 통합시킨 군단의 주인은 한 사장의 이름을 불러대었다. 켈시가 살아있다는 소문으로 저를 우롱하는 거라면 그 모욕의 죗값을 네 목숨으로 치르라며 고함을 지르고 흉폭한 발톱을 휘둘렀다. 그 누구도 가까이 가지 못했다. 이미 언급해서도 안 되는 검은 고리를 정수리 위로 띄운 전적이 있는 수감자였다.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떨려오고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공포의 후광이 신처럼 그에게 내려앉았다. 누가 보스를 좀 말려주세요! 자그마한 목소리가 울려퍼졌으나 웅웅대는 소리에 그 어떤 것도 진공의 장벽을 뚫지 못했다.
엔퍼는 웃음이 나왔다.
사랑을 근간으로 한 공포의, 공포에 의한, 공포. 맙소사, 이보다 더 훌륭한 인간이 존재하기나 할까.
마치 꿈에 나왔던, 그 허망함과 사랑과 비탄과 자애의 조각상을 깎아들 힘을 불어넣어주던 미지의 목소리처럼….
몹시도 익숙한 힘이다.
엔퍼는 공포에 질리지 않았다. 그는 공포에 웃었다. 가느다란 눈웃음을 지은 예술가는 또각또각 다가가서 한 손에 든 망치와 한 손에 든 끌을 들고 망설임없이 이성을 잃은 이의 앞에 섰다. 당신은 가족을 잃었나요? 아니면 당신의 손으로 죽였나요? 혹은 둘 다인가요? 어쩔 수 없이 작품에 자기 자신을 갈아 넣는 것이 예술가라서 엔퍼는 상대에게 자신과의 일치감을 재고자 했다. 대답해주세요, 부디요. 답하지 않는 상대가 휘두른 주먹이 다가왔다. 망치로 한 번 가볍게 후려쳤다. 맥없이 나가떨어지는 조야의 주먹에 그 꼬맹이 녀석은 조금 당황했을까. 엔퍼는 알고 있었다. 애초부터 이 자는 지금 화풀이를 하고 있다는 것을. 무엇도 진심으로 할 생각이 없으므로 제 말을 알아듣고 저에게 시선을 가둬두고 있음을.
엔퍼는 끌 하나를 들어 조야의 다른 손바닥에 박아넣었다. 성스러운 흔적처럼 조야의 손바닥 한 가운데를 파고 들어간 끌에 비명조차 지르지 않는 괴물이 썩 마음에 든다. 엔퍼는 이제 두 손이 자유롭다. 상대는 두 손이 묶였다. 마치 조각과도 같은 형태다. 엔퍼의 공포는 사랑을 근간으로 한 공포의, 공포에 의한, 그러나 ‘공포를 위한’ 공포라서. 조야의 볼에 엔퍼의 손이 섬세하게 가닿았을 때, 조야는 트라우마와도 같은 끔찍한 과거를 온 세포로 느껴야만 했다.
아직 태워넣을 공포가 있단 것이 몹시도 마음에 들어요.
속삭인 엔퍼에게로 조야가 추락했다. 그를 안락하게 받아들려 한 엔퍼는 생각보다 육중한 무게에 다리 힘이 풀렸고-조각가란 팔힘은 있어도 다리힘은 영 그닥이니-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엔퍼의 무릎에 조야의 피눈물이 뚝뚝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괴로운 공포를 실컷 맛 봐서 그 무엇도 남지 않도록 해요. 직시해요. 순수한 당신을. 속삭이는 이름 모를 조각가의 목소리에 조야는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지옥같군. 이름 모를 조각가는 답했다. 삶은 지옥이죠. 타인도 지옥이고요.
규칙적인 숨소리가 고르게 잦아들 때 쯔음, 엔퍼는 고개를 들어 자그마한 아이를 바라보았다. 당신, 국장님 좀 불러와줄래요?
'2차 > 무기미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라후샬롬 / 정서 검사 (0) | 2024.12.29 |
|---|